[비평문] <이해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 노보의 작업에 대하여>
1. 변화가 아닌 또렷해짐
노보의 이번 개인전은 흔히 기관 개인전에 기대되는 ‘전환기’라는 서사로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 이전 작업과의 단절이나 새로운 방향의 선언보다는, 오히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태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에 가깝다. 이는 변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변화라는 언어로 설명되기에는 이미 충분히 축적된 시선과 작업의 리듬이 이번 전시 전반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에서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달라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끝까지 유지되고 있는가이다. 노보의 작업은 언제나 일상의 사물에서 출발해 왔지만, 그 사물들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작가는 반복해서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자신만의 태도를 천천히 축적해 왔다. 이번 전시는 그 태도가 가장 안정된 밀도로 드러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2. 이해의 개념이 이동하는 방식
노보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이해’다. 그러나 이 이해는 타인에게 전달되거나 공감을 획득하는 감정적 결과로서의 이해가 아니다. 최근 작업에서 이해는 점점 설명의 결과에서 벗어나, 복잡함을 성급히 정리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이동한다. 다시 말해 이해는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로 작동한다.
이러한 이해의 개념은 근대적 인식론이 전제해 온 ‘이해 = 설명 가능성’이라는 도식을 벗어난다.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이해(Verstehen)는 대상에 대한 인식 이후에 도달하는 결과가 아니라, 세계 안에 이미 던져진 존재(Dasein)가 취하는 근본적인 존재 방식이다, 이해는 무엇을 파악한 뒤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으로서 선행한다. 이때 이해는 해석의 완결이 아니라, 세계에 열려 있는 상태로 남는다.
노보의 작업은 이러한 이해 개념과 깊이 맞닿아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히 규정하기를 유보한다. 판단이나 비판을 통해 세계를 정리하기보다, 사물과 함께 머무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해는 여기서 설명의 언어로 전환되지 않고, 작업의 리듬과 반복 속에 머문다. 이는 작업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선택이 아니라, 이해를 하나의 태도로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다.
3. 사물과 반복: 신즉물주의적 태도의 변주
노보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물들은 공, 트로피, 신발과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들이다. 이 사물들은 명확한 상징 체계를 형성하지도, 특정한 서사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는가가 아니라, 왜 이 사물들에서 시선이 떠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좌표는 신즉물주의적 태도로 자주 언급되는 조르지오 모란디다.
모란디에게 병과 항아리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같은 사물을 반복해서 그리며 변화보다 지속을 선택했고, 설명보다 태도의 축적을 택했다. 그의 회화에서 이해는 해석의 결과가 아니라, 시선이 머무른 시간의 총합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노보의 작업은 이 계보를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 모란디가 다루었던 사물들이 비교적 중립적이고 무명의 대상들이었다면, 노보의 사물들은 이미 소비되고 이미지화되며 욕망을 탑재한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노보의 작업을 동시대적 조건 위에 놓이게 만든다.
4. 팝 이후의 세계, 그리고 조용한 선택이 지점에서 노보의 작업은 팝아트 이후의 시각성과도 연결된다. 톰 웨슬만은 광고 이미지와 소비재, 신체를 통해 이미 과잉된 이미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가였다. 웨슬만에게 사물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노출되어야 할 이미지였다. 그는 이미 의미가 고정된 기호들을 확대함으로써, 우리가 사물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드러냈다. 노보의 작업은 이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그의 사물들 역시 웨슬만 이후의 세계에서 온 이미지들이지만, 다루는 방식은 철저히 조용하다. 사물은 폭로되지 않고, 과장되지 않으며, 다시 머물게 된다. 반복은 스타일이 아니라 관찰이 누적된 시간의 흔적으로 작동하고, 사물은 기능과 의미를 잠시 내려놓은 채 바라보아지는 대상으로 남는다. 이 조용한 선택은 팝 이후의 세계에서 이해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읽힌다.
5. 동시대의 태도: 틸만스와의 접점
이러한 태도는 동시대 작가 볼프강 틸만스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틸만스는 일상적인 장면과 추상적인 이미지를 병치하면서, 세계를 특정한 메시지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설명을 요구하기보다,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묻는다.[4] 이는 이해를 결론이 아니라 관계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태도다. 노보 역시 사물을 통해 어떤 주장을 펼치기보다, 일정한 거리에서 세계와 호흡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밝음과 놀이의 감각은 즉각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과잉된 의미와 속도로부터 한 발 물러난 결과다. 이 거리감은 작업을 가볍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밀도를 부여한다.
6. 여백으로 남겨진 이해
이번 전시에서 말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기 위한 여백으로 기능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하나의 명확한 문장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그 작업이 닫힐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영역은 의도적으로 열어둔다.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이해 개념은 중요한 참고점이 된다. 아렌트에게 이해란 사건을 하나의 논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불투명성과 모순을 제거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사유하는 능력이다. 이해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함부로 단순화하지 않기 위한 윤리적 태도다.
노보의 작업에서 설명되지 않은 채 남겨진 영역들은 바로 이러한 이해의 윤리 위에 놓여 있다. 이해는 말로 고정되지 않고, 작업의 리듬 속에서 유지된다. 이 태도는 작업을 닫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만드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7. 유지되는 태도, 열려 있는 방향
노보의 이번 개인전은 어떤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태도가 유지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변화의 속도보다 지속의 리듬을 선택하고, 설명보다 이해의 상태를 택하며, 판단보다 머묾을 선택하는 태도다. 이 전시는 하나의 결론으로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작업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를 남긴다.
이해는 완결된 개념이 아니라, 계속해서 선택되어야 하는 태도로 남는다. 노보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늘의 세계와 조용히 호흡을 맞춘다.
평론가 강승민